금오신화,이생규장전,과거이야기와독자의현재

금오 신화의 시대는 인간의 육체의 기능과 교류를 막고 헐뜯고 혐오하고, 정신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유교 사상이 문화적으로 뿌리를 깊게 시작했다.

리오 서울대 장전만 보면 팥을 설탕에 졸인 것 시 당대를 벗어나혁신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와 그 변화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는 작가다.

그가 자유로운 사랑을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랑이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의 종법화 이전에는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가능했던 사랑이 점점 불가능하게 되는 것을 알고 이에 따른 연인들의 비극적 상황을 알것이다.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은 육체적 욕망을 하찮게 생각하면서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에 얽매인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때에 그들은 자신의 영혼과 몸 양쪽을 묶는 불합리한 이중 구속적 관념의 덫에 걸린 채 죄를 저지르거나 스스로 삶을 마치기도 했다.

남성성을 자본화하는 성 억압을 남성과 여성에게 부과하면서 남성은 남성성의 상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며 성 결핍으로 성 욕망의 폭발적 분출에 의한 자기 제어의 실패도 이중으로 두려워해야 했다.

성의 자유를 시행하면 좋은데, 개인이 자유로운 사랑을 하면 좋은데 도대체 왜 모두가 그런 고통을 견디게 되었을까?수직적 혈연을 남성성 중심으로 구축하고 사회 전체가 소호 일체화가 진행하고 모든 자원과 자본이 가장 남성에게 배정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든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담론이 그렇듯, 수혜자인 부자도 강력한 담론적 구속 옷을 입고 담론의 기획을 수행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 이전의 자유로운 사랑은 점차 조선에서 소멸했다.

자유로운 사랑은 가문 내의 젠더 기반 질서와 가문 간의 성 평등적 자본의 교환과 결합에 비 예측적 파국적 방해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 귀교 영혼의 특정의 의의가 더 부각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사람과 귀의 만남이라는 기이하고 몽환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비도덕적인 만남이라도 육체를 떠나서 정신적으로 만나면 환상 공간에서는 용납할 수.이 세상은 오로지 사랑 때문에 영혼의 교류 때문에 담장을 건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들키면 유전 교사상의 성 억압적 변질, 잘못된 사회적 규제 때문에 아버지에게 억압돼야 했다.

가문의 누를 미칠지 무서워서 아버지를 탓할 것이 무서워서 개인이 주체적으로 할 수 없었다.

무책임하게 큰딸에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말았다.

이미 시작부터 사랑을 직접적인 표출하지 않고 최대한 묘사하고 은유하고 자기와 상대의 내면을 보는 모습에서, 이번 생의 비겁함과 의지 박약함을 알 수 있다.

혈기는 있지만 용기가 아니라 유교 지식인의 안타까운 표상으로 볼 수 있어 이 인생의 고통과 공황은 여기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인생을 엄격히 비판할 수는 없다.

이번 생은 유교의 교리에 따르고 부모님과 자신을 빛나기 위해서 입신 양명해야 하며 항상 체면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 자체는 이 삶에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아이가 된 도리를 계속 생각해야 하므로 그 틀을 벗어나고 참신한 생각과 자신의 또 다른 길을 찾기도 볼 수 없는 것이다.

항상 격식 차려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탐구할 수 없는 것은 허명에 묶인 가문의 종마의 인생이다.

그는 자발적인 자유 의지와 열정적인 용기를 통해서 적절한 실천지를 찾으려고 시도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왜 굳이”로 대표되는 이런 행동의 자유에 대한 비논리적 자기 압박과 사회적 압박의 양쪽은 결국 둘(이생과 최 장녀)를 새장 속의 잉꼬에 말로 다 표현 못한 벙어리 장갑의 마음을 강요한다.

그래서 최·딸은 그리워하는 정이 깊어지고 원한이 맺어진 유령이 되어 버릴 것이라며 사생 결단의 의지가 담긴 고백을 부모로 하게 된다.

자신의 간청을 거절한다면 자살만이 있을 것이라고 가까스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마저 절개를 지키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이 여기서 보인다.

그녀는 이미 말만으로 죄가 가득 찼다고 한다.

”귀신이 되어 버릴 것 같다”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사람 귀교 영혼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람 귀교 영혼은 유교 사회가 명령하는 틀에 따른 관계를 영적으로도 회피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물론 저승에서 만나지만 어쨌든 귀신 되고 사회의 눈과 물리적 구속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때문이다.

그녀는 절박하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현실을 부인할 수 없는 육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므로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해서라도 정을 통하고 싶어. 이어지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다.

최처녀의 필사의 의지를 통해서 맺어진 인연은 부부의 절개와 의리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양 받게 된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세상만이 살아남게 된다.

살아남은 이번 생은 전쟁의 참화에 타버린 집으로 찾아 갔다가 죽은 아내를 귀신의 모습으로 보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 귀교 영혼의 다른 상징적 의미가 나타나고 있다.

유령이 되어도 인연을 맺고 관계라면 그 관계는 인간의 세상과 관계 없이”삼세” 이렇게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삶이 유령이 되더라도 두 사람이 환생하더라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 사람의 만남이 영혼과 영혼의 교류를 통해서 육체를 떠난 만남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이 말부터 모든 비현실적인 것을 제거하다면 철저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억압과 상황에 의해서 사랑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적어도 이 이야기의 공간에서나마, 사랑하는 누군가와 만남을 생각하고 상상으로라도 만나고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그렇게 충분히 이루지 못하더라도 어떤 상황이 맞는지 어떻게 하는 게 더 옳은지